요나는 그의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와 이스라엘 모두의 모형이 되는 '이중적 모형(dual type)'을 형성한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두 장자(firstborn Sons) 모두의 이중적 모형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 모형의 두 부분 모두에 담긴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고 교훈적이다.
그리스도의 모형
요나는 그의 죽음, 장사(burial), 그리고 부활에 있어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사역 동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령을 모독한 사건 이후, 그들이 표적을 요구했을 때 오직 한 가지에만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선을 요나에게로 돌리셨는데, 왜냐하면 그 시점부터 그분의 사역은 필연적으로 왕관(Crown)보다는 십자가(Cross)의 방향으로 더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마태복음 12:40; 요나 1:17).
모형론에서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죽었다(요나 2:1, 2 [2절에서 "지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스올(Sheol)'이며, 이는 신약 그리스어 텍스트의 '하데스(Hades)'와 같은 의미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뜻한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죽으셨고, 요나가 그랬던 것처럼 스올(또는 하데스)로 내려가셨다(사도행전 2:31 [시편 16:10의 인용으로, 구약 성경에는 스올이 사용되었고 신약 성경에는 하데스가 사용되었다]).
요나와 그리스도 모두 "밤낮 사흘(삼 일)" 동안 죽은 자들의 장소에 계셨으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분이 "제삼일에" 살아나셨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요나 1:17; 마태복음 12:40; 누가복음 24:7, 21, 46; 고린도전서 15:4).
(앞서 언급된 구절들에 나오는 "밤낮 사흘"과 "제삼일"이라는 표현은 성경이 이 문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바라볼 때에만 오직 서로 일치될 수 있다. 전자의 표현인 "밤낮 사흘"은 그리스도께서 요나서 1:17을 인용하신 것이며, 우리의 서구식 사고방식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 나타난 유사하거나 평행한 용례와 연관 지어 이해해야만 한다.
구약 성경의 평행하거나 유사한 용례를 보면, "하루의 일부"를 "그 하루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가르침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창세기 40:13, 20; 사무엘상 30:12, 13; 역대하 10:5, 12; 에스더 4:16; 5:1]. 따라서 성경적 틀 안에서 볼 때,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밤낮 사흘" 동안 죽음의 장소에 계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제삼일에" 살아나셨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부 성경 연구가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밤낮 사흘"이라는 표현[동양의 관용적 표현]을 72시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동양에서 기원한 것을 서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며, 성경에 의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만약 "밤낮 사흘"이라는 표현이 72시간과 동의어가 아니라면[분명히 동의어가 아니다], 요나는 제삼일과 관련하여 언제 살아났을까? 그 답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관련된 구약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요나가 72시간에 미치지 못하는 제삼일에 살아났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물고기 배 속에 온전히 72시간 동안 있었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72시간이 지난 후인 '제사일(네째 날)'에 살아났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적 관점에서 "밤낮 나흘"이 관련되었을 것이다 ("낮"과 "밤"은 창세기 1장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점에서 분리할 수 없는 단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쳐두더라도, 앞서 말했듯이 요나는 그리스도와 이스라엘 모두의 모형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삼일에 살아나신 것처럼 [고린도전서 15:4], 이스라엘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호세아 6:1, 2]. 이러한 측면에서 요나 역시 제삼일에 살아났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시점에서 성경의 모형-실체 구조가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형
그다음 요나를 이스라엘의 모형으로 바라보면, 요나는 이방 도시인 니느웨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나님께 위임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다른 방향으로 갔다(요나 1:1-3). 그 후 요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 타게 되었고, 그곳에서 큰 폭풍이 일어났으며, 결국 그는 바다 자체에 빠지게 되었다(요나 1:4-16).
("바다"는 성경에서 이중적인 은유로 사용된다. 즉, 이방 나라들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와 죽음의 장소라는 두 가지 의미 [출애굽기 14:21-31; 요나 1:12-2:10; 요한계시록 13:1; 17:1, 15; 21:1, 4]. 이 두 가지 의미는 요나서에 모두 나타나며, 유대 민족의 전체 역사를 포괄한다.)
주님께서는 요나를 삼키도록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요나 1:17),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죽었습니다 (요나 2:1, 2). 그 후 "밤낮 사흘"이 지난 뒤 요나는 "육지"에 살아있는 채로 뱉어졌고, 다시 사명을 받아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이방 도시 니느웨로 갔다(요나 1:17; 2:10; 3:1-10).
정확히 똑같은 일이 이스라엘에게도 일어났고 또 일어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땅끝까지 주의 증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국가다 (이사야 43:9-12). 과거의 이스라엘은 요나처럼 가기를 거부했고, 결국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은 결국 죽음의 장소에 처하게 되어 이방 나라들 가운데 흩어졌고, 오늘날에도 그 상태로 남아 있다(땅에 남아 있는 생명 없는 남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이틀 동안—즉 2,000년 동안—바다에 가라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영적인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현재 불신앙 가운데 그 땅에 거주하는 남은 자들로 인해, 이스라엘은 요나 시대에 바다에 일어난 큰 폭풍으로 예표된, 주변 이방 나라들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현재적 불안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에게 생명을 부여함
그러나 "밤낮 사흘이 지난 후", 즉 "제삼일에" 이스라엘이 정확히 요나처럼 다시 살아날 날이 오고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제삼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친히 살아나신 분에 의해 부여될 것이다. 한 아들이 이런 방식으로 다른 아들을 살릴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여덟 가지 표적 중 일곱 번째 표적을 형성하는 나사로의 부활 기사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표적들은 모두 유대인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미래의 다루심의 어떤 측면과 관련이 있다(요한복음 20:30, 31; 고린도전서 1:22).
나사로가 부활할 당시 그는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었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땅을 떠나 계신 지 이틀이 되셨을 때였다(요한복음 11:6, 7, 17, 39). 그때—그 땅을 떠나신 지 이틀이 지난 후에—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시점에 그분이 돌아오시는 목적은 나사로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기 위함이었다(요한복음 11:3-6, 24, 25, 43, 44).
본문의 "이틀"(요한복음 11:6)은 그리스도께서 떠나 계셨던 이틀—즉 2,000년—을 가리킨다. 이 이틀이 끝날 때, (모형을 형성하는) 그 표적에서와 정확히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실 것이며, 그분이 돌아오시는 목적 또한 동일하게 나사로가 모형으로 보여주었던 자, 즉 이스라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기 위함일 것이다.
호세아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고 이스라엘이 그분의 목전에서 살기 위해 일으키심을 받는 것은 "이틀이 지난 후... 셋째 날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의 문맥에 따르면, 이 이틀의 기간은 2,000년의 유대인 경륜(Jewish dispensation)을 포괄한다. 그리고 이는 미래의 환난 시기 동안, 즉 유대인 경륜의 마지막 7년인 대환난 동안 유대 백성이 고난을 받는 것으로 정점에 달하게 될 것이다(호세아 5:13-6:2).
그렇다면 요한복음 11장의 "나흘"(요한복음 11:17, 39)은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대 역사의 나흘—즉 4,000년—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창세기 12:1-3의 복과 관련하여 그녀의 온전한 부르심을 결코 실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일곱 번째 표적에서 이 나라(이스라엘)는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살아 본 적이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스라엘은 구약의 신정 통치 체제 안에서 지속적인 불순종을 통해 자신들이 부름받았던 그 높은 위치를 결코 깨닫지 못했고, 결국 이방인들 가운데 분산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이방인의 때"가 이어지게 되었다).
다가오는 그날에…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이틀),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또 다른 이틀 동안),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완전한 성취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곧 바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이 찌른 그분을 바라볼 것이며, 그 찔림을 받으신 분의 피를 받아들일(appropriate) 것이다. 그들은 바다로부터(이방 나라들과 죽음의 장소로부터) 인도함을 받아 올라올 것이며, 자신들의 땅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출애굽기 12장에서 시작되는 모형과 정확히 일치하여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이 주제를 다루는 성경 전체의 모든 다른 모형들과도 정확히 일치하여 일어날 것이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시작되는 모형에서, 유월절 밤에 모든 이스라엘 가정에는 죽음이 임했다. 가족 중 장자를 대신하여 어린양이 죽임을 당해 피를 흘렸거나, 혹은 대속할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지 않아 가족 중 장자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었다.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려진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는 그 가족의 장자가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이미 죽었음을 보여주었고, 반대로 피가 없다는 것은 장자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대속물이 없었기 때문에) 보여주었다.
밤중에 애굽 땅을 두루 지나시던 주님께서는 문설주와 인방에 있는 피를 보시고 그 집을 넘어가셨다(pass over). 주님은 그 집의 장자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아셨다. 어린양이 그 가족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었고, 하나님께서는 만족하셨다.
그러나 밤중에 애굽 땅을 두루 지나시던 주님께서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보지 못하셨다면, 주님은 그 집의 장자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아셨다. 그러면 그 가족의 장자 자신이 직접 죽음을 경험해야 했으며, 그것만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출애굽기 12:1-29).
다가오는 그날에 이스라엘은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장자(출애굽기 4:22, 23)로서의 이스라엘은 대속물 안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보시고 장자가 죽었음을 아시며 만족해하실 것이다.
피를 받아들임을 통해 새로운 탄생, 즉 위로부터의 거듭남이 일어날 것이다. 한 나라가 "하루 만에", "단번에" 태어날 것이다 (이사야 66:8).
그때, 구약 시대에 믿음 안에서 죽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나사로처럼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나아올 것이다. 그리고 전체 나라—피를 받아들인 살아있는 유대인들과 이전에 이미 피를 받아들였던 부활한 유대인들—는 함께 하나님 보시기에 살게 될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나사로가 그랬던 것처럼 살과 피와 뼈를 가진 자연적인 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며, 대환난에서 살아남아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구원받은 살아있는 유대인들 역시 동일한 형태의 몸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이스라엘)는—자연적인 몸을 입은 채—새 언약 아래에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된 땅에 신정 통치 체제 안에서 거할 것이다(출애굽기 19:6; 예레미야 31:31-33).
이스라엘은 요나처럼 바다(이방 나라들과 죽음의 장소)에서 건져질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새 언약 아래, 신정 통치 체제 안에서 다시 그 땅에 배치되면, 요나가 바다에서 건져진 후 니느웨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갔던 것처럼, 유대 백성들은 온 땅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 나아갈 것이다(창세기 45:1-5, 26; 이사야 43:1-10; 53:1-12).
한 아들(이스라엘)이 생명의 메시지를 전할 것인데, 그 생명은 오직 다른 아들(예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때에야, 오직 그때에야 하나님의 복의 충만함이 이스라엘을 통해 온 땅의 민족들에게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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