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전쟁: 육체, 성령
성경에서 아말렉 족속의 참된 위치와 중요성을 보고, 이들이 언급된 여러 본문에 나타난 모형론(typology)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아말렉 족속의 조상인 에서(Esau)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말렉 족속이 이 시기 이전부터 민족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말렉 민족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시대 전이나 후를 막론하고, 그들의 역사 전체를 통해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비록 에서의 자손 이전의 아말렉 족속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거의 없지만 말이다).
에서의 존재는 성경이 아말렉 족속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제공하는 유일한 연결고리이다. 그들은 아브라함 시대에 그 기원에 대한 언급 없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이 원래 출현한 시점보다 나중에 에서와 연관되게 된 것은, 어떤 특별한 이유를 위한 신성한 계획(Divine design)으로 보아야 한다.
(영적 참조 틀 안에서) 아말렉 족속의 참된 본질을 묘사하는 특성들이 바로 에서라는 인물 안에서 나타나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출애굽기 17:8-16과 같은 말씀의 의미가 자명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장자의 권리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던 에서는 이삭의 장남이었다. 그는 문제들을—특히 그의 장자권(성경에서 에서에 대해 유독 두드러지게 지적하는 장남으로서의 권리)에 관한 문제들을—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아니라 세상이 보는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에서에 대해 성경은 그가 “그의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다(despised)”고 말씀한다(창세기 25:34).
70인역(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은 ‘가볍게 여겼다’는 단어로 에서는 자신의 장자권을 보잘것없는 소유물, 즉 하찮거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자신의 장자권을 사실상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장자권을 이처럼 바라보았던 에서는, 단 한 끼의 음식인 “떡과 팥죽”을 위해 장남으로서의 권리를 그의 쌍둥이 형제 야곱에게 팔아넘겼다. 그는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즉 육체적 만족을 채우기 위해 장자권을 판 것이다.
에서가 장자권을 팔고 너무 늦을 때까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했다는 이 기록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다섯 가지 주요 경고 중 마지막 경고를 형성한다(히브리서 12:16, 17). 히브리서 12장의 이 기록은 그 책의 모든 내용이 향해 나아가는 정점(apex)을 이룬다. 앞선 네 가지 경고는 장자권에 관한 전체적인 가르침의 서로 다른 단면들을 다루고 있으며, 히브리서 12장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은 앞선 경고들의 요약이자 마지막 경고를 위한 도입부 역할을 하여, 모든 것을 부르심에 대한 신실함이라는 생각과 하나로 묶어준다.
에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문제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영적인 관점이 아니라 육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았다. 그리고 너무 늦은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그제야 장자권을 참된 빛 안에서 보게 되었다.
따라서 “에서”는 육적인 사람을 표상하고, 그의 형제 “야곱[실제로는 ‘이스라엘’]”은 영적인 사람을 표상한다. 이는 앞선 성경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이 설정된 방식과 유사하다.
(모형의 더 구체적인 부분을 언급하자면, “야곱”이라는 이름은 육적인[또는 자연적인] 사람과 관련이 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영적인 사람과 관련이 있다 [창세기 32:28-30; 시편 147:19, 20; 이사야 9:8]. 예를 들어, 이사야 43:1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별도의 창조[인류 가운데 두 번째 창조를 세우사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두 창조를 남겨두신 것]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곱”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따라서 이 창조는 자연적인 사람의 창조였기 때문에 출산을 통해 물려 내려갈 수 있었다.)
또한 누가복음 1:32, 33에서 그리스도의 미래 왕국이 “야곱의 집” 위에 임할 것이며, 그것이 “영원히[헬라어, 에이스 토우스 아이오나스eis tous aionas(‘세대들에 관하여’ — 메시아 시대뿐만 아니라 영원을 구성하는 모든 이어지는 세대들까지 포함)]” 지속될 것임에 주목하라. 자연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이 구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메시아 시대 전체 동안뿐만 아니라, 새 땅과 영원한 세대들 전체에 걸쳐서도 이 현재의 땅에서 자연적인 몸을 입고 거하게 될 것임을 드러낸다[나사로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을 때 가졌던 모형적 몸과 완전히 일치하며, 이는 이스라엘의 미래 부활을 예표한다(요한복음 11:6, 7, 43, 44)].)
성경이 장자의 권리와 관련하여 에서를 어떻게 제시하는지 보는 것이 아말렉 족속이 언급된 여러 본문에 내재된 다양한 영적 교훈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열쇠(KEY)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확히 그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말렉 족속을 특징짓는 주된 요점은 하나님의 일들, 특히 장자의 권리에 관한 일들에 대해 에서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세 시대에 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장남인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출애굽기 4:22, 23).
모형에서 이스라엘은 신정국가 안에서, 다른 땅에 있는 장자의 권리를 상속받기 위해 애굽에서 부름을 받았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둘러싼 모든 것이 향해 나아가는 방향이었다(출애굽기 15:1-18).
그러나 그때 아말렉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스라엘이 민족적 부르심의 목표에 도달하기 전, 여정의 이 지점에서 그들을 멈춰 세우려 했다.
실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 12:5-8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 또는 “아들”이며, 양자 됨(adoption)을 기다리고 있고, 이어서 장남들에게 속한 상속 유업의 실현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 상속 유업은 (땅이 아니라 천상의 [에베소서 1:11-14; 빌립보서 3:20; 히브리서 3:1]) 다른 땅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대부분은 모른다), 현재 그들의 삶에 있는 모든 것이 향해 가고 있는 방향이다.
그리고 육체의 사람인 아말렉이 현재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모형에서와 정확히 똑같이 공격하면서 말이다(비록 지금은 빛이 존재하지만, 어둠도 남아있다 [창세기 1:3-5; 고린도후서 4:6]). 그리고 아말렉은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그리스도인들을 목표 직전에 멈춰 세우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말렉으로 표상되는 육체의 사람은, 장자의 권리를 상속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대적하는 데 주된 목표를 둔 존재로 성경에 제시된다.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서, 개인들이 자신들이 부름받은 그 상속 유업을 깨닫고 얻지 못하도록 모든 가능한 수단을 통해 막으려 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아말렉은 어떻게 패배시켜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17:8-16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조우 및 전투에 관한 기록의 내용이다. 성경의 이 섹션은 구속받은 개인들이 현재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훗날 신정국가 안에서, 다른 땅에 있는 장자의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육체의 사람을 어떻게 패배시켜야 하는지를 드러내 준다.
아말렉을 죽이라,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말렉을 죽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말렉이 일어나 당신을 죽일 것이다.
이것은 사무엘상하에 생생하게 계시된 가르침이다(민수기 14:42, 43; 20:2-21).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 (사무엘상 15:3).
그러나 사울은 불완전한 순종을 드렸다. 그는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아말렉의 소유 중 가장 좋은 것들—즉 “주님께 제사하기 위해” 양과 소, 그리고 기름진 것들과 어린 양들과 그의 눈에 좋아 보이는 모든 것을 남겨두었다(사무엘상 15:7-15).
이는 결국 주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에서 버리시는 결과를 낳았다(사무엘상 15:16-28). 그리고 훗날, 사울이 이전에 아말렉에 관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후 한 아말렉 사람이 나타나 사울을 죽였다.
사무엘상 31:1-6에 나오는 사울의 죽음에 대한 기록과, 사울을 죽인 아말렉 사람이 사무엘하 1:2-10에서 다윗에게 전한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아야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고 이해할 수 있다.
사울은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칼 위에 엎드러졌으나 실패했다. 그때 한 아말렉 사람이 나타났고, “너는 누구냐?”라는 사울의 질문에 그는 “나는 아말렉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사무엘상 1:7, 8).
그러자 사울이 말했다.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고통이 내게 임하였음이라” (사무엘상 1:9).
그리고 그 아말렉 사람은 다윗에게 이야기를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사무엘상 1:10).
사울은 처음에 아말렉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사울이 “엎드러진” 후에, 아말렉은 그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왕권(regality)마저 빼앗아 가 버렸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3:11의 경고와 연결되는 구약성경의 핵심 요점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지금 주님의 명령대로 아말렉을 죽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말렉이 당신을 쓰러뜨리고 결국 일어나 당신을 죽이고 당신의 면류관을 빼앗아 갈 것이다.
그리고 이 “면류관(crown)”은 장자의 권리 중 왕권에 속한 부분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다가올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리를 차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오직 면류관을 쓴 통치자들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올라 장자권의 나머지 두 가지 측면(왕들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되는 것[왕-제사장], 그리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분과 공동 상속자로서 아버지의 모든 소유의 갑절의 몫을 받는 것)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투의 수단과 기간
출애굽기 17:8-16에 나오는 아말렉과의 전투 기록에서, 모세는 아론과 훌을 동반하고 근처 산에 올랐고, 이스라엘 자손은 아래 골짜기에서 아말렉과 싸웠다. 그리고 전투 중에 모세가 그의 손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이겼다. 그러나 그가 지팡이(왕권의 홀[sceptre], 출애굽기 4:20-23)를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출애굽기 4:10, 11).
모세가 산 꼭대기에서 홀을 들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중적인 모형이 존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형의 한 부분을 성취하시며) 아무런 도움이 필요 없으시겠지만, (모형의 다른 부분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아론과 훌은 이 두 번째 모형의 부분에서 볼 수 있다.
그림의 한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하여 전투를 싸우시는 것과 관련이 있고, 그림의 다른 부분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전투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전투 중에 피곤해지며, 마찬가지로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점에서 서로를 도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0:23-25의 내용이다. 우리에게 “우리 믿음의 고백[원어상 ‘소망의 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며, 또한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여” 서로 격려하고 권면하며 기도하기 위해 같은 마음을 가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이기를 힘쓰라고 말씀한다.
외딴 유배지 같은 곳에서 치르는 전투는 때로 외롭고 지치는 전투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경주에서 서로를 돕도록 권면을 받아왔다. 그들은 성령의 검(에베소서 6:10-18)을 가지고 원수와 싸우기 위해 올바르게 무장하고 나아갈 때, 서로를 격려하고 각자가 홀을 높이 들 수 있도록 돕도록 권면을 받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투는 “해 진 녘까지(until the going down of the sun)”(출애굽기 17:12) 치러져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체 기간 동안 지속되는 전투를 묘사할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장기적인 믿음의 경주 속에 있으며, 전투는 경주의 전 과정 동안 존재한다.
모세가 전투 중에 피곤해지기 시작했을 때, 아론과 훌은 그의 손을 붙들어 올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 밑에 돌을 가져다 두어 그가 앉아서도 여전히 홀을 높이 들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아론과 훌의 도움을 통해 모세는 그 시간의 전체 기간 동안 이와 같이 계속할 수 있었다. 성경은 “…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니라”(출애굽기 17:12)고 기록한다.
모세가 앉았던 그 “돌(stone)” 자체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가리켰고,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 즉 홀 역시 그 왕국을 가리켰다(다니엘 2:34, 35, 44, 45). 게다가 모세와 아론과 훌은 어떤 특정한 산—‘그 산’의 꼭대기에 올라갔었는데, 성경에서 “산(mountain/hill)”이라는 단어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왕국(kingdom)을 의미한다(이사야 2:2-4). 모형적으로 그들은 홀을 높이 든 채 어떤 특정한 왕국의 꼭대기에서 전투를 치른 것이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에 관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된다—그것은 바로 사탄 아래에 있는 현재 왕국에 속한 것들에서 눈을 떼어,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다가올 왕국에 속한 것들에 눈을 고정하는 것이다.
창세기 19:17의 말씀처럼 말이다.
“…산으로 도망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네가 소멸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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