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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임재 안으로

바울과 복음 /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바울과 복음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바울의 ‘복음’이라는 단어 사용은 반드시 항상 문맥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오늘날 교파에서 거의 예외 없이 사용되는 방식,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그의 회심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 그에게 전달된 좋은 소식을 지칭하기 위해 이 단어를 몇 번이고 거듭 사용했다(갈라디아서 1:11, 12).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바울은 대다수의 경우에 이 단어를 그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핵심, 곧 그에게 전달되어 그가 이방인 세상 전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신비(비밀) 안에 포함된 좋은 소식을 지칭하는 데 훨씬 더 많이 사용했다(에베소서 3:1-11; 골로새서 1:25-29). 그리고 바울이 사역했던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말하거나 기록한 내용의 문맥으로부터 그가 사용한 ‘복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바울 사역의 이러한 중심축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들을 통독해 보면 자명해진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모두 선포했으며,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HOW)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했는데, 이는 후속적으로 그들에게 그들이 왜(WHY)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를 들어, 장로들을 통한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지막 메시지(사도행전 20:24-32)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명확하게 개략적으로 설명되어 있는지 주목하라. 혹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1:7-23; 2:1-22; 3:1-21)에서도 이 문제가 얼마나 명확하게 요약되어 있는지 주목하라. 그리고 이와 유사한 구조는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일반 서신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린도전서 15:1-4가 지닌 이중적 특성 때문에, 이 구절은 복음과 관련된 바울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아래에 나오는 이 구절 전체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중적인 의미가 아니라 단일한 의미,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함없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

 

“또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을 너희에게 밝히 알리노니, 너희 역시 그것을 받았고 또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이라. 만일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굳게 붙잡고 있다면), 너희가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을 때 그것에 의해 너희도 구원을 받느니라.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달하였노니,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라”(고린도전서 15:1-4).

 

이 구절은 은혜의 복음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고린도전서 15:1, 2)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 잠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고린도전서 15:3)으로 돌아갔다가, 그러고 나서 다시 시작했던 곳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고린도전서 15:4)으로 돌아온다. 이로써 구원의 과거, 현재, 미래적 측면을 아우르는 완전한 복음 메시지를 제공한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자신이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중심 메시지로 시작했다. 그런 다음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반드시 먼저 선포되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메시지로 잠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들은 후에 선포되어야 할 메시지, 곧 그가 이방인 세상 전역에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중심 메시지로 돌아왔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고린도전서 15:1에 나오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언급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만들려고 할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나머지 세 구절에 언급된 모든 내용 역시 은혜의 복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 발생한다. 본문을 평이하게 읽어보면 명백히 알 수 있듯이(앞으로 보여주겠지만), 고린도전서 15:2은 은혜의 복음과 결코 관련될 수 없다. 또한 앞으로 보여주겠지만, 고린도전서 15:4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장사와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속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뿐이다. 그리스도의 ‘장사’와 ‘부활’은 이것을 넘어서며, 지속되는 좋은 소식인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에 속한 것들과 관련이 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시작되는 모형(type)에 주목하라. 이 장에서는 오직 ‘죽음’만이 보인다. 처음 태어난 자(장자)들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이 대속적인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정확히 똑같다. 처음 태어난 자들에게 ‘죽음’이 선고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이 대속적인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모형에서는 이것이 유월절 양들의 죽음과 이 죽임 당한 양들의 피를 올바르게 바르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실체에서도 이것은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유월절 양이 처음 태어난 자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나, 피가 발라져야 한다(믿음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은 이 지점에서 일어나며, 이를 넘어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장사’와 ‘부활’은 모형에서 이것을 넘어선다. 즉, 홍해 통과(장사)와 홍해 동쪽 기슭으로의 나옴(부활)이다(출애굽기 14:13-15:19; 고린도전서10:2). 그리고 실에서도 정확히 똑같다(골로새서 2:12; 3:1-25).

 

고린도전서 15:1, 2

 

고린도전서 15:1, 2은 바울이 이전에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포했던 좋은 소식(복음)을 가리키며,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현재 그 위에 서 있다. 고린도전서 15:2에서 이 좋은 소식은 구원의 현재와 미래적 측면과 관련이 있었으며(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서 보이는 과거가 아님), 선포된 것을 굳게 잡는 것(상실의 가능성이 있음)과 관련이 있었고,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염두에 둔 목적(또는 원인)을 가지고 그 메시지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이 복음에서의 구원의 현재 및 미래적 측면은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직역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고 있는 중이라’]”라는 단어들로 나타난다. 선포된 메시지를 굳게 잡는 것은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기억하고 있으면 [직역하면, ‘만일 너희가 굳게 잡고 있다면(잡고 있는 중이라면)’]”이라는 단어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염두에 둔 목적과 관련하여 메시지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직역하면, ‘...목적 없이(또는 눈앞의 원인 없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단어들로 나타난다. 구원의 현재와 미래적 측면은 혼(soul)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야고보서 1:21; 베드로전서 1:4-9).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영원한 구원—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영(spirit)의 구원(요한복음 5:24; 에베소서 2:1, 5)—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혼(soul)의 구원을 실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한다.

 

그리고 구원의 이 두 가지 측면은 반드시 항상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유지되어야 한다. 선포되는 메시지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을 굳게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히브리서의 두 번째와 네 번째 경고에서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2의 헬라어 본문에 나타나는 동일한 단어가 두 번째 경고(히브리서 3:6, 14)에서 두 번, 네 번째 경고(히브리서 10:23)에서 한 번 나타난다. 두 번째 경고에서 굳게 잡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하늘의 부르심’과 ‘소망’과 관련이 있으며(히브리서 3:1, 6), 네 번째 경고에서 굳게 잡는 것은 이 동일한 소망—"우리 믿음의 고백 [직역하면, '소망의 고백']"과 관련이 있다(히브리서 10:23-25).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목적 없이(또는 원인 없이) 믿는다는 생각은 오직 사람이 계시된 목적을 위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킬 수 있으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목적은 태초에 인간이 창조된 목적과 동일하다. 즉,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이다(창세기 1:26, 28).

 

인간은 장차 그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권능과 권세의 자리를 차지할 것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았으며, 이는 미래의 날에 구원의 현재적 측면—곧 자기 혼(soul)의 구원—을 실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고린도전서 15:2에서 목적 없이(또는 원인 없이) 믿는 것은 사람을 아무 데도 이르게 하지 못한다. 개인은 구원을 받았는데, 이는 바울이 앞 절에서 언급한 복음을 믿음으로써만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고린도전서 15:2에 명시된 대로 현재 자신의 삶을 그에 따라 다스림으로써만 장차 실현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3, 4

 

고린도전서 15:3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목하라. 여기서 바울의 진술은 앞의 두 구절의 주제를 이어가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자명하다. 바울은 이 점을 말 그대로 진술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3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로 시작한다. 그가 언급하려는 것은 그가 그들에게 먼저 선포했던 것(고린도전서 15:1, 2에서 이전에 언급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기 전)이며, 이것은 그가 또한 받았던 것(즉, 고린도전서 15:1, 2에 언급된 좋은 소식에 더하여 받았다는 뜻)이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먼저 선포했던 메시지는 고린도전서 2:1, 2로 돌아가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갔을 때, 그는 고린도전서 15:1, 2(그리고 고린도전서 15:1, 2에서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선포[고린도전서 2:2; 15:3]가 선행되었던 고린도전서 2:1)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로 시작할 수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갔을 때, 그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로 가득 찬 도시를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이 기준에 근거하여 고린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역해야만 했다. 그는 먼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관한 단순한 메시지를 선포해야만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못 박히심”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시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개인들이 일단 믿고, 일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고 나면, 바울은 이 메시지를 넘어설 수 있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15:3은 이 문제의 이중적 측면을 다루는데, 이는 먼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그 다음에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선포되는 십자가의 전파에서 볼 수 있다. '‘먼저’[고린도전서 15:3]라는 단어는 이 시점의 주제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지만, 고린도전서 15:3이 놓여 있는 문맥은 그 주제가 구원받은 자들과도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앞서 언급한 측면에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그들 가운데서[단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메시지를 듣고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사도행전 18:11; 고린도전서 2:3-16).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 2에서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이라고 단순히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이러한 것들을 넌지시 언급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들은 그가 이 복음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며 이전에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그가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필연적으로 그들에게 ‘먼저’ 선포해야만 했던 것,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일 수밖에 없었던 것(고린도전서 15:3)을 언급했을 때 그 차이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처럼 뒤로 물러섰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와, 자신이 이방인 세상 전역에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중심 메시지에 관한 것들을 계속해서 언급했다(고린도전서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