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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임재 안으로

구원(영, 혼) / 창세기 1:1-2:3에 신성하게 계시됨

 

 

성경은 구속(redemption)의 책이다. 그리고 구속을 둘러싼 기본적인, 변치 않는 가르침들은 목적을 시야에 두고 맨 처음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첫째 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무한한 지식과 지혜 속에서 망가진 피조물을 회복하시는 변치 않는 방식을 제시하신다.

 

특정한 패턴을 따르는 회복의 사역이 있으며, 그 일은 전적으로 신성한 개입(Divine intervention)을 통해 성취된다. 그리고 맨 처음에 제시된 이 변치 않는 패턴 안에서, 하나님은 그 이후의 ‘어떤’ 망가진 피조물이라도 어떻게 회복되어야만 하는지를 계시하신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성한 개입을 통해, 6일(6천 년)의 기간 동안 어떤 특정한 순서에 따라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본에 관한 올바른 생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창세기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만약 잘못된 견해를 가진 모든 이들이 창세기 1장에서 시작하여, 망가진 피조물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제시하신 바를 이해하고 고수했더라면, 오늘날 구원에 관한 잘못된 견해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구원에 관한 더 구체적인 생각으로 들어가자면, 앞서 말한 내용은 영(spirit)의 구원뿐만 아니라 혼(soul)의 구원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이 기초적인 틀의 구조 안에서, 영의 구원(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구원)은 6일의 맨 처음에 실현된다.

 

그러나 혼의 구원(사람의 믿음의 끝에, 또는 사람의 믿음의 목표로서 일어나는 구원 [베드로전서 1:5, 9])은 진행 중인 과정이며, 6일의 끝인 일곱째 날에야 오직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실제로 인간 그 자체인 전체(영과 혼 모두)와 관련된 구속에 속한 변치 않는 기본 원리들은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 1:1-2:3에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올바른 관점 안에서 구원을 이해하고 모든 오류를 피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기—오직 여기에서만—사람은 맨 처음에 놓인, 변치 않는 기본 원리들을 제시하는 변치 않는 기초를 볼 수 있다.

 

영의 구원

 

히브리서 4:12는 인간의 혼과 영 사이에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의 바로 그 시작 부분의 구절들로부터 이끌어낸 가르침이다(앞서 히브리서의 동일한 장에서 ‘하나님의 백성’ 앞에 놓인 ‘안식’과 관련하여 나타난 바와 같다[히브리서 4:4, 9]).

 

창세기 1:2b에서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고, 창세기 1:3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혼과 영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기초적인 모형이라 불리는 곳)다(실체라 불리는 것 안에서). 모형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셨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며,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창세기 1:2b, 3은 망가진 물질적 피조물의 회복을 이룩하시는 셋-하나 하나님의 초기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참여하신 사역이다—성령이 움직이셨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며, 그런 다음 아들(Son)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라(요한복음 1:3).

 

실체인 인간의 구원 경험의 틀 안에서도 그 문제는 동일하니다. 반드시 셋-하나 하나님의 사역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기록에서 망가진 피조물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셨던 방식이며, 이후의 사역을 위한 변치 않는 패턴을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형에서와 같이 실체에서도—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빛이 존재하게 된다.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이루신 아들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한다. 성령의 움직이심과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둘 다 거의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일에 기초하고 있다. 아들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원어로는 ‘다 이루어져 왔다’]”(요한복음 19:30; 누가복음 23:46)라고 외치셨을 때, 그분은 정확히 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전적으로 아들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한, 신성한 기원을 가진 구원을 받았음을 밝힐 때,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히 그 의미를 뜻한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 그는 영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오늘날 “허물과 죄로 죽었던”(에베소서 2:1)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살아날 때, 그는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망가진 피조물을 회복하기 위한 성령의 움직이심(창세기 1:2b)과 하나님의 말씀하심(창세기 1:3)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말씀을 사용하여 구속받지 못한 인간 안에서 초자연적인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이다. 이 지점—하나님의 숨결을 통해서—이전에 생명이 없던 것에 생명이 부여된다. 하나님께서 죽은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성령께서 아들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말씀을 사용하심), 인간은 ‘살아나게’ [‘생명을 얻게’] 된다 (에베소서 2:1, 5).

 

이 지점에서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고린도후서 4:6), 빛과 어둠 사이에 분리가 이루어지며(창세기 1:4), 어둠은 빛인 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요한복음 1:5; 고린도전서 2:14).

 

인간의 구원에서 영이 혼으로부터 분리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구원받지 못한 인간 안의 ‘영’은 죽어 있다. 그것은 거하는 ‘선한 것이 없고’ ‘사망의 몸’을 가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일부다(로마서 7:18, 24). 성령의 움직이심과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말씀을 사용하심으로, 인간의 영은 살아나고, 동시에 그의 혼으로부터 분리된다.

 

‘혼’은 어둠의 영역 안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것이 바로 ‘육에 속한 [그리스어 프수키코스psuchikos, 혼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다 (고린도전서 2:14). 어둠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빛을 전혀 깨닫거나 이해할 수 없다. 이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하나님이 세우신 분리가 존재한다(누가복음 16:26).

 

혼의 구원

 

앞서 언급한 과정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로 인해 타락한 상태에 있는 영을 건져내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식이다. 그리고 영이 건져내어 졌기 때문에, 다시 한번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을 수 있다. 인간은 이제 영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제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사역이 일어날 수 있어서, 인간은 마침내 6일의 끝에, 곧 6천 년의 끝에 하나님이 차지하도록 정하신 그 자리로 인도될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모형의 틀 안에서, 이것이 바로 가장 첫 번째로 예표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로 제시되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회복 과정에서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살아나야만—먼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야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워진 패턴에 따라 인간의 완전한 회복—영, 혼, 몸 (데살로니가전서 5:23)—을 이룩하기 위해 사용하실 6일의 맨 처음에 예표되어 있다. 망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이 창세기 1장에서 망가진 물질적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의 패턴을 어떻게 따르는지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사항에 주목하라.

 

· 회복의 6일 각각의 날에 일어난 일.

· 회복 과정의 전체가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가—일곱째 날의 안식.

 

모형-실체의 틀 안에서—원형에 있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첫째 날에 모형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 영의 구원과 관련이 있고, 둘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모형에서 일어난 일은 인간 혼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

 

영의 구원은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즉각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혼의 구원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점진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시점에서 시작되어, 6일간의 회복 사역—6,000년간의 회복 사역—으로 예표된 기간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료되고 실현될 사건이다.

 

(현 세대의 끝—6일의 끝, 6,000년의 끝에 일어날—그리스도의 심판대의 쟁점들은 혼/생명의 구원 [또는 상실]을 둘러싼 문제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혼의 구원을 실현하거나 [또는 실현하는 데 실패하는] 곳은 심판대 앞이지—그 전이 아니다.)

 

영의 구원이 창세기 회복의 첫째 날에 일어난 일에 대한 실체에서의 정확한 복제 없이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혼의 구원과 그것이 둘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어난 일과의 관계도 동일한 방식으로 바라보아야 함이 분명하다. 후자도 전자와 동일한 정도로 패턴을 따라야만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므로, 창세기에서 망가진 물질적 피조물의 회복 과정 중 둘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어난 일에 주목하라. 그런 다음, 구속받지 못한 인간 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일의 전반적인 그림을 보기 위해, 이 동일한 사건들을 이후의 망가진 피조물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현재 진행 중인 회복과 관련하여 바라볼 수 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첫째 날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분리와 관련이 있다.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들 사이에 분리를 세우셨고(창세기 1:6-8), 셋째 날에는 마른 땅(그 안의 식물들과 함께)과 물들 사이에 분리를 세우셨다(창세기 1:9-13).

 

그 후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사건들은 또 다른 하나의 단위로서 함께 속해 있으며, 이전에 세워진 분리들을 넘어선 것들을 묘사한다. 넷째 날에 하나님은 땅 위에 빛을 주시기 위해 하늘에 빛들을 두셨고(창세기 1:14-19), 다섯째 날에는 땅 위를 날아오를 수 있는 새들과 바다 깊은 곳을 움직일 수 있는 해양 생물을 창조하셨으며(창세기 1:20-23), 여섯째 날에는 땅을 배회할 수 있는 큰 피조물들을 포함한 육지 동물들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24, 25).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창세기의 물질적 피조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회복 사역 전체는 오늘날 인간과 관련된 하나님의 회복 사역 전체를 예표한다.

 

인간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후, 즉 전적으로 신성한 개입을 통해 영이 혼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구속받지 못한 인간은 지속적인 신성한 사역이 일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위치와 조건에 있게 된다. 그리고 오직 이 지속적인 신성한 사역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회복 사역 전체가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은 물질적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영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한다[그는 죽어 있으므로 행동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인간은 물질적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땅이 ...을 내니라”], 혼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반드시 능동적이어야 한다[그는 이제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적 영역에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 피조물의 회복에서와 같이, 전체 구원 과정[영과 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몸]은 신성한 사역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요나 2:9].)

 

창세기 1장의 처음 사흘 동안 일어난 사건들은 사람의 영적 삶과 성장 피라미드의 초보적인 것들 또는 기초적인 것들을 가리킬 것이다. 첫째 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생명의 부여와 관련된, 혼과 영 사이의 분리를 가리킬 것이다. 그런 다음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일어난 사건들은 첫째 날에 존재하게 된 새로운 생명의 틀 안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할 때 마주하는 분리들과 구별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은 혼적인 것과 영적인 것,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육체의) 것,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 세대(dispensations) 등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오직 사람이 둘째 날과 셋째 날에 성취된 바에 의해 묘사된 분리들과 구별들을 배울 때에만, 그는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성취된 바에 의해 묘사된 것들로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 사흘 동안, 해와 달에 빛이 회복되었고(넷째 날, 창세기 1:14-19), 바다 생물과 공중의 새들이 창조되었으며(다섯째 날, 창세기 1:20-23), 그 후 하나님은 땅을 배회하는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여섯째 날, 창세기 1:24-27).

 

이 사흘 동안 셋-하나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묘사된 바는 실체에서의 초보적인 진리들을 넘어선 것들을 가리킨다.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고’ 초보적인 진리들 안에서 훈련을 받은 ‘후에’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그가 ‘위로부터 태어나고’ 그의 그리스도인 삶에서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그는 비로소 이해력을 가지고 말씀의 더 깊은 영적 진리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다. 그는 비로소 이해력을 가지고 창세기 1장의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사건들에 의해 묘사된 말씀 안의 부류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위치에 있는 개인은 말씀 속으로 깊은 갱도를 파고 들어가 그 보화들을 캐내기 시작할 수 있다. 그는 말씀을 들여다보고 하늘의 빛들에 의해 묘사된 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참된 의미에서 고공을 오르며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1)를 경험할 수 있다. 또는 바다 생물들이 바다 깊은 곳으로 뛰어들듯 말씀의 깊은 곳을 탐사할 수 있고, 육지 생물들이 땅을 배회하듯 말씀을 두루 다닐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영적 승리는—혼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과—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간다. 그리고 6일 동안 일어나는 하나님의 회복 사역의 전체 과정은 그 너머, 일곱째 날에 있을 일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안식일의 안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