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말의 시간, 심판, 새로운 시작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첫째 아들들이 죽으리라…”
“밤중에 여호와께서 모든 애굽 땅의 첫째 아들을 치시매…”
(출애굽기 11:4, 5a; 12:29a).
“그러므로 너는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그녀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밤중에…”(룻기 3:3a, 6a, 8a).
“밤중에 소리가 나서 보라, 신랑이 오니
너희는 그를 맞으러 나오라” (마 25:6).
성경에서 ‘자정(midnight)’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 11:4이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종말의 시간에 일어나고,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첫째 아들들의 죽음, 그 후 출애굽). 이렇게 성경의 이 지점에서 ‘자정’이 사용된 방식은 성경 전체를 통해 결코 변하지 않는 첫 언급 원칙(first-mention principle)을 세운다.
즉, 출애굽기에서 확립된 대로, 이후 성경 어디에서든 ‘자정’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룻기 3:8; 마태복음 25:6) — 하나님의 심판이 종말의 시간에 일어나고,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는 것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이 전체 문제의 원래 기본 틀은 성경의 처음 34절(창세기 1:1-2:3)에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께서 황폐한 창조물을 육일 동안 회복하신 후 안식하신 일과 관련되며, 성경 전체의 칠일 구조(septenary structure) 속에서 보인다.
성경의 이 시작 부분의 틀과 구조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이 소책자의 서두에서 언급된 ‘자정’이 등장하는 세 곳(출애굽기 11:4; 12:29; 룻기 3:8; 마태복음 25:6) 때문이다. 처음 등장(출애굽기)은 창세기 1장 하루째의 하나님의 회복 사역(창세기 1:2b-5)이 예표하는 것과 관련된다. 룻기와 마태복음에서의 등장은 이틀째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하나님의 회복 사역(창세기 1:6-31)이 예표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리고 여섯 날 전체의 회복 사역이 예표하는 것은 일곱째 날 안식(창세기 2:1-3)이 예표하는 것을 향한 것이다. 성경의 시작 부분에서 이렇게 소개되고 앞서 다루어진 것은 구원의 과거·현재·미래와 관련이 있다. 과거의 구원(은혜에 의한 구원, 영에 관한 것)은 하루째의 하나님의 회복 사역으로 예표되며, 출애굽기 11장과 12장에서 예표로 나타난다.
현재의 구원(혼, 생애의 구원)은 이틀째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하나님의 회복 활동으로 예표되며, 룻기 3장에서 예표적으로, 마태복음 25장에서 비유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미래, 즉 일곱째 날의 구원(해방)을 향한 것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된 세 본문에서 보이는 ‘자정’의 개념은 육일(6,000년, 사람의 날)이 예표하는 것의 끝, 종말의 시간에 관한 것이며, 이는 일곱째 날(1,000년, 주의 날)이 예표하는 새로운 시작을 향한 것이다.
(앞선 기본 사상에 대한 생각은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는 구원의 전체적 전경에 대한 많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잘못된 곳에서 시작한다. 사람은 항상 신약의 어느 곳에서 시작하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창세기 첫 구절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성경 교리를 연구하든 올바른 시작점은 창세기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교리적으로 모든 것이 그렇게 뒤죽박죽이 된 주된 이유이다. 사람이 올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곳에서 시작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대로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과거와 미래 심판
출애굽기 11장과 12장에서 보이는 ‘자정’은 원래 창세기 1장의 하루째(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존재하게 된 것)에서 예표된 것과 관련되며, 이는 과거의 심판과 그에 따른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파멸된 사람은, 창세기 1장에서 하루째의 땅이 스스로 파멸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또한, 창세기 1:2b-5에서 원래 예표된 하나님의 회복 사역과 관련하여, 사람에 대한 미래의 심판이란 있을 수 없다. 현재의 사역, 즉 생명이 없는 자에게 성령이 생명을 불어넣는 사역은 과거의 신성한 사역(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요구하신 값을 지불하신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 초기 회복 사역과 연결된 모든 심판은 과거의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아들의 인격 안에서 죄를 심판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성령께서 생명을 불어넣으신 자들과 불어넣지 않으신 자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점에서 차이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심판은 이미 과거에 끝났다. 요한복음 3:18을 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나니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요.” 어떤 사람도(구원받은 자이든 구원받지 못한 자이든) 자신의 영원한 구원이 쟁점이 되는 미래의 심판에 서는 일은 결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류 전체(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모두)를 이 문제에 관하여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모두에 대한 미래의 심판은, 과거에 이미 결정된 것을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이미 심판받은 것에 관하여 다시 미래에 심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출애굽기 12장의 예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라. 거의 15세기 후 갈보리에서와 정확히 똑같이,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 양들의 죽음과 흘린 피를 통해 죄를 심판하셨다. 그 후,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을 통과하신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의 심판이었다. 그것은 이미 과거에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는 것이었으며,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과 그 피를 올바르게 바른 것에 근거한 것이었다.
주의 지시를 따른 자(죽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자, 즉 집안의 첫째 아들이 대속물로 죽었음을 나타낸 자)에게는 여호와께서 그 집을 넘어 지나가셨다. 모든 심판은 이미 과거의 것이었고, 현재 집행될 심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첫째 아들은 이미 죽었다. 그러나 주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자(피를 바르지 않은 자, 첫째 아들이 대속물로 죽지 않았음을 나타낸 자)에게는 여호와께서 그 과거의 심판을 그 첫째 아들에게 개인적으로 집행하셨다.
첫째 아들은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대속물 없이 자신이 직접 벌을 치렀다. 이처럼 성경에서 ‘자정’의 첫 언급은 심판과 연결되지만, 이미 내려진 심판의 집행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이 생각을 성경 전체를 통해 따라가면, 그리스도인과 관련해서는 룻기 3장의 예표와 마태복음 25장의 비유에서 동일한 기본 원리가 나타난다. 심판과 그 집행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심판’(그리스어, 크리시스krisis)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 걸쳐 사용된다. 따라서 ‘심판’이라는 단어의 사용 여부로 미세한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며, 맥락이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현재와 미래 심판
현재의 죄에 대한 심판은 미래의 심판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앞 절에서 과거와 미래 심판을 다룰 때와 동일하다. 전자(과거와 현재의 심판)는 그대로 심판이다. 그러나 후자(미래의 심판들은) 이미 심판된 것을 집행하거나 청산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여전히 ‘심판’으로 불리고 언급된다. 그 미래의 때에 모든 죄는 실제로 과거에 이미 심판을 받았다. 과거에 이미 심판받은 것을 미래에 다시 심판할 수는 없다. 앞 절에서 이미 심판받은 것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었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 이 완성된 사역에 관하여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현재 하늘 성소에서 자신의 흘린 피를 근거로 행하시는 사역(오직 그리스도인을 위한 사역)에서도 정확히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2b-5에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빛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빛은 어둠을 대체하거나 없애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빛을 어둠 곁에 두셨고, 어둠은 완전히 그대로 두셨다. 요한복음 1:5과 고린도후서 4:6의 말씀처럼, 빛은 어둠 속에서 비쳤고,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둘은 완전히 양립할 수 없다.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어둠이 예표하는 것(옛 죄성)이 있지만, 오직 구원받은 자에게만 빛이 예표하는 것(새롭게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이 있다. 그리고 어둠, 즉 옛 본성이 구원받은 자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새 본성에 시선을 두지 않으면 쉽게 옛 본성을 따르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하늘 성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현재의 정결케 하심을 베푸신다. 이것이 요한복음 1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몸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신 장면, 또는 요한일서 전체에서 보이는 내용이다. 이 점에서 죄에 대한 현재의 심판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현재 자신을 판단하면(고린도전서 11:31), 장차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로마서 8:1). 장래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때, 한 측면에서는 모든 심판이 이미 과거의 것이 될 것이다 — 갈보리에서 일어난 심판이든, 하늘 성소의 속죄소에서 일어난 심판이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은 이미 심판된 것을 집행하거나 청산하는 것이지만, 역시 심판적인 의미로 언급된다.
그러나 문제의 또 다른 측면도 있다 — 고백되지 않은 죄, 즉 하늘 성소의 속죄소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전에 처리하지 않으신 죄를 가지고 심판석에 서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런 성질의 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판이 미래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언제 일어나겠는가? 룻은 밤중에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나타났지만, 정결한 상태로(룻기 3:3, 6, 8) 나타났다.
따라서 그녀에게 기다리는 심판은 없었고, 오직 특정한 일들(기업의 속량과 결혼)의 집행만이 기다리고 있었다.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은 자정에 왔다. 다섯 처녀는 룻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혼인 잔치)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다섯은 준비되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 그에 따라 다루어졌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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