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님의 임재 안으로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1)

그리스도의 초림 때 황폐하게 버려진 이스라엘의 집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며 따라다니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3:34-39)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을 때, 하나의 중심적인 목적이 시야에 있었다. 하나님의 장자(출애굽기 4:22, 23)인 그 나라는 애굽에서 나와 다른 땅, 곧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셨던 땅으로 들어가 그 땅에서 장자의 권리, 즉 장자권(primogeniture)을 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출애굽기 19:5, 6).

 

그리고 모세의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년 동안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장자로서의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이 행한 일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모세의 날에는 하나님의 장자가 그 신정정치(theocracy) 안에서 장자권을 실현하는 신정국가가 임박해 있었다. 그러나 불신앙 때문에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땅에 들어가 그 주민들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인들이 땅에 들어가 그 땅 안에서 신정정치를 실현하는 일은 불신앙적이고 책임 있는 그 세대 전체(20세 이상인 자들 [민 14:29])가 무대 뒤로 사라질 때까지 연기되었다.

또한, 모세가 이후 민수기 20:8-11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순종하여 반석을 쳤기 때문에, 그 역시 그 세대와 함께 계수되어 이스라엘인들을 땅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주님은 대신 여호수아를 이 과업을 위해 세우셨다(민수기 20:12; 27:12-14; 신 34:1-12).

 

이처럼 가데스 바네아에서 보인 불신앙에 동참했던 모든 자가 모세와 함께 죽자, 여호수아는 나라를 인도하여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거의 40년 전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을」 때(출애굽기 40:34) 시작된 신정정치는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그 땅에서 처음으로 존재했으며, 약 8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신정정치는 바벨론 포로기 때 영광이 성전에서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에스겔 8:4, 6-9; 9:3; 10:4, 18; 11:22, 23). 그러나 그 신정정치는 수 세기에 걸친 존재 기간 내내, (아들의 지속적인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향해 부르신 부르심이 내포한 높이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그 후, 바벨론 포로기와 신정정치의 종말로부터 약 600년이 지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이전에 그 땅으로 돌아왔던 남은 자들의 후손들(5세기 이상 전에 스룹바벨 아래에서 시작된 회복)을 발견하셨다. 비록 당시에 남은 자들이 그 땅에 있어 이스라엘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신정정치의 회복은 없었다. 왜냐하면 영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영광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돌아올 것이었다(에스겔 36:16-38; 39:21-29; 43:1-5).

 

이방인의 때

 

이방인의 때(이방인들이 세계 정세와 정부 등을 통제하는 시기)는 영광이 떠난 시점과 영광이 회복되는 시점 사이에 위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여기 계셨을 때 이방인의 때는 그 과정을 달리고 있었다. 로마가 세계 강국이었으며, 로마는 그 땅에 있는 남은 자들뿐만 아니라 당시 로마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된 목적을 위해 이방 나라들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지배권을 행사하도록 존재하게 되었다(창세기 12:1-3; 22:17, 18; 출애굽기 19:5, 6).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된 땅에서 신정정치 하에 열방의 머리로 거해야 했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에게도 복을 주셔야 했다. 모든 영적인 축복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스라엘에게로,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흘러가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열방에 대해 차지하도록 부름받았던 위치가 완전히 역전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땅을 침략하여 유대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도록 허용된 것이다(북왕국은 기원전 722년경 아시리아에 의해, 남왕국은 기원전 605년경 바빌로니아에 의해 포로가 되면서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수 세기 후 그리스도께서 땅에 계셨을 때도 이방인들은 여전히 세계 정세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되었는가? 왜 이방인들이 유대 백성과 그들의 땅을 모두 포함하는 통제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도록 버려두셨는가?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런 방식으로 다루셨는가?

 

또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셨을 때 이방인의 지배 아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불신앙과 불순종 속에서 동방박사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되신 분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싶어 했으며, 제시된 왕국과도 아무런 상관도 없고 싶어 했다.

 

왜 그랬을까? 결국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로마의 통제와 이방인의 지배 전반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켰을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편에는 오직 거절만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이전에 왕국을 제안하셨고(약 3년 반 동안 지속된 제안),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왕국을 다시 제안하셨다(약 30년 동안 추가로 지속된 제안). 이 두 번 모두에서 왕국을 제안하시는 큰 수고를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두 번 모두 제안된 왕국을 거부했다.

 

첫 번째 왕국 제안에서 유대 백성들은 거부하는 과정에서 그 제안을 하시는 분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분, 즉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이자 포도원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마태복음 21:38; 요한복음 3:2).

 

그 후, 왕국이 다시 제안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원래의 제안에서 반응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 메시지에 반응했다. 그들은 메시지를 선포하는 자들을 위협하고, 때리고,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기 시작했다(사도행전 5:40-42; 7:54-60; 8:1-3; 9:24, 29).

 

그들은 여전히 포도원의 상속자가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그렇게 되려면 그분이 하늘에서 돌아오셔야만 했다 [사도행전 3:19-21; 7:56, 57]).

 

「은혜의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로마서 11:5)를 제외한 나라 전체가 그 종교 지도자들이 세운 하향 곡선을 따랐으며,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약 서기 62년경에 그 나라를 한 세대(dispensation) 동안 따로 제쳐두시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예루살렘은 당시의 이방 세계 강국인 로마에 의해 서기 70년에 멸망당했고, 유대 백성들은 이후 이방 나라들 사이에 흩어져 그들의 처분에 맡겨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따로 제쳐져 하나님께서 한 세대 동안 별개의 백성,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형성하는 자들을 다루시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그 나라의 부르심과 관련하여 세우신 원칙들은 여전히 효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축복과 저주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인해 후자의 범주(저주)에 떨어질 것이고,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태도와 대우에 따라 어느 한 범주(축복 또는 저주)에 떨어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후 이 전반적인 문제를 생생하고 세밀하게 설명해 주셨다. 모세를 통해 주신 계시에는 두 개의 긴 장—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유대 백성이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경우 일어날 일과 반대로 불순종할 경우 일어날 일을 설명하기 위해 큰 공을 들이셨다.)

 

이스라엘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이방 세력들이 땅에 들어와 유대 백성을 뿌리 뽑도록 허용하셨다(레위기 26:33; 신명기 28:64).

그리고 그 세대의 나머지 기간과 이어지는 세대 동안,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기간 동안에는 한 가지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부르심을 통해 의도하셨던 방식으로 이방 나라들이 복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축복은 이스라엘이 신정정치 하에 그 땅에 거하는 것을 통해 흘러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의 축복은 이스라엘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때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회복을 기다려야만 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정정치 회복을 포함해야만 했다.

 

그림은 아버지가 모든 이방 나라를 축복하는 통로가 되도록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장자(아들)가 (불순종을 통해) 아버지의 은총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이다.

 

그 결과 이 아들에게 징계가 임했고, 아버지는 이방 나라들이 자신의 아들을 정복하고 통제하도록 허용하셨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위해 유보해 두셨던 수많은 축복이 동일한 이방 나라들로부터 차단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일부 이방인들(나라들과 개인들)은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도와 그분의 아들을 징계하려 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저주를 불러들였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세기 12:3a)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이방 백성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이방인들의 반유대주의적 행동]』(스가랴 1:14b, 15)

 

반면에 다른 이들(나라들과 개인들)은 일어난 일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간에, 아버지의 아들에게 친구가 됨으로써 스스로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었다(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을 때 이방인들을 위해 유보된 풍성한 축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말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창세기 12:3a)

 

수 세기 동안의 전 세계 상황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둘러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그 나라의 부르심과 관련된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다루심, 그리고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관련된 이방 나라들에 대한 그분의 다루심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이 점에서 모든 것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지금도 돌아가고 있다.

 

이스라엘만이 유일한 열쇠다.

 

그리고 세계의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둘러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동일한 나라들을 직면하고 있는 그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해결책의 시작조차 있을 수 없다. 세계 역사의 문제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그만큼 중요하다.

 

또한 모세 시절 아라비아의 항상 타오르는 떨기나무나, 다니엘 시절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달궈진 풀무불 속의 세 히브리인으로 예표된, 애굽의 벽돌 가마에서부터 아우슈비츠의 가마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은, 그 나라의 부르심과 관련하여 성경에 명시된 것 외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아버지는 불순종으로 인해 그분의 아들을 징계하고 계신다. 그리고 때때로 이방 나라들이 개입하여 「고난을 더하였고[징계를 도왔고]」, 이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이다(비록 이 동일한 이방 나라들이 그 일에 대한 대가를 비싸게 치렀거나 치르게 될지라도 말이다 [창세기 12:3]).

 

아들이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는 한, 징계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는 이방인들이 「고난을 더하려」 함을 통해 상황이 악화되어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다(마태복음 24:22a).

 

그러나 그 날에는

 

그러나 그 날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징계하려는 인간의 헛된 시도에 개입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그 날들을 감하실 것이며, 그분의 아들을 위해 이 일을 하실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에 과거의 모든 징계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아들은 궁극적으로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에게 신정정치를 회복시키시며, 이방인의 때를 끝내실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있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바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세상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창조주께서는 명확한 용어로 이 문제를 밝히셨으며, 그분의 아들에게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이 문제를 말씀하셨다. 순종은 축복을 낳고, 불순종은 저주를 낳는다.

 

하나님의 불순종하는 아들은 반드시 회개의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오직 그때에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 나라들을 축복하실 수 있다.

 

'주님의 임재 안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상태보다 더 나빠진 마지막 상태  (1) 2026.05.29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2)  (0) 2026.05.27
시온주의  (1) 2026.05.25
그분은 빛이시다.  (0) 2022.03.21
그분은 사랑이시다.  (0) 2022.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