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주님의 이 미래의 선언들은 과연 누구를 향한 것인가?
주님은 전지(全知)하시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아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런데도 마태복음에서는 두 번에 걸쳐, 미래의 어느 시점에 특정 무리의 개인들을 다루시는 것과 관련하여, 그 무리에 속한 이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7:23) 그리고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5:12)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실 것임을 언급하셨다.
주님께서 그분의 전지하심 속에서, 어떻게 이른바 ‘그날’에(마태복음 7:22) 특정 개인들을 알지 못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답은 간단하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7:23) 하신 주님의 말씀과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5:12) 하신 말씀은 상대적인 선언, 즉 당면한 사안과 관련된 상대적인 표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실제로 주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에게도 이런 선언을 하실 수가 없다.
구원받은 자들에게 하시는 이러한 종류의 선언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구원받은 상태를 둘러싼 일들에 관한 사안에 상대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시는 이러한 종류의 선언 역시 필연적으로 그들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둘러싼 일들에 관한 사안에 상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선언은 결코 그 사람의 구원받았거나 구원받지 못한 상태 그 자체와 연관될 수 없다. 구원받은 자든 구원받지 못한 자든,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미래의 심판은 결코 영원한 구원이나 영원한 형벌을 다룰 수 없다. 요한복음 3:18에 따르면, 두 부류 모두 이 점에 있어서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전자는 아들의 이름을 믿었기 때문이고, 후자는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21-23
‘그날’은 현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자들(현재 하늘들의 왕국을 제안받고 있는 자들[구원받은 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왕국에 들어가기 위한 목적으로 심판을 받기 위해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는 때다(마태복음 7:13, 14, 21, 22).
따라서 본문과 문맥 모두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마태복음 7:21-23에 묘사된 장면은 오직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만을 다룰 수 있다.
‘그날’에 주님 앞에 나타날 ‘많은’ 이들은 주님과의 거짓되고 친밀한 연합을 통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했던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생각하며 사역들을 수행했을 것이나, 주님께서는 ‘그날’에 자신이 이 사역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을 그들에게 드러내실 것이다.
마태복음 7:23에서 주님의 부정적인 응답은 두 가지 사항과 관련이 있다.
· 왕국에 들어가는 것 (마태복음 7:21)
· 기적적인 사역들 (마태복음 7:22)
여기서 주님은 ‘그날’에 특정 개인들이 그분의 임재 앞에 나타날 것인데, 그들은 이전에 기적적인 사역들을 수행함으로써 맺어진 주님과의 친밀한 연합을 근거로 하늘들의 왕국에 들어가려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무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3)
주님은 자신이 이 사역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을 선언하실 것이며, 당면한 사안인 ‘왕국 입장’과 관련하여 그러한 사역에 자신들을 연루시켰던 자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실 것이다. 이러한 연루를 통해 이 개인들은 넓은 문, 넓은 길로 들어간 셈이 되었으며(마태복음 7:14), 주님의 임재 앞에서 이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들은 그분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할 지위들을 거부당하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25:1-13
마태복음 25:12에서 특정 개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 주님의 선언은 혼인 잔치를 염두에 두었을 때 미련한 다섯 처녀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미련한 처녀들은 이 잔치에 참여할 적절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열 처녀 비유와 마태복음 22:2-14에 나오는 혼인 잔치 비유를 비교해 보면, 여분의 기름이 없다는 것은 한 영역에서의 준비 부족을 보여주고, 예복이 없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에서의 준비 부족을 보여준다.
그 연결 고리는 분명하다. 여분의 기름으로 표상되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예복을 구성하는 의로운 행실(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두 비유에서는 동일한 진리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분의 기름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앞에 부적절한 옷을 입고 나타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소유하지 못해 주님의 임재 앞에 벌거벗은 채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22:11-14; 요한계시록 3:18; 19:7-9). 결과적으로 그들의 부적절한 복장 때문에, 주님은 당면한 사안인 ‘혼인 잔치 입장’과 관련하여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이다.
기노스코(Ginosko), 오이다(Oida)
마태복음 7:23; 마태복음 25:12의 헬라어 본문에서 ‘알다’라는 단어가 흥미롭게도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다.
한 가지 유형의 지식을 가리키는 기노스코(Ginosko)는 마태복음 7:23에 사용되었고, 다른 유형의 지식을 가리키는 오이다(Oida)는 마태복음 25:12에 사용되었다. 기노스코는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유형의 지식을 말한다. 즉,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경험을 통해 그분과 맺어지는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지식의 유형이다(요한일서 2:3, 4에서와 같다). 이 단어는 바울이 빌립보서 3:10에서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리고 이러한 지식, 즉 그리스도와의 그러한 관계의 최종 결과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탁월한 부활)에” 이르는 것이었다(빌립보서 3:11).
반면에 오이다는 경험과 무관하게 얻어지는 지식, 즉 ‘절대적인 지식’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나 성경의 다양한 사실들에 대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의 유형이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3:2; 5:13).
마태복음 7:23에서 그리스도께서 기노스코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그분께서 행해진 기적적인 사역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 사역들을 행한 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주장했을지라도, 실제로는 그러한 관계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질문(헬라어 본문에서 부정어 ‘ou’가 사용된 방식으로 보아, 그들은 실제로 이 기적적인 사역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수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며,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질문이다)에 응답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기노스코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이 사역들과 절대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매우 주의 깊게 보여주셨다.
오늘날 현 세대의 끝자락에서, 기적적인 사역들(마태복음 7:22)을 나타내고 있는 교파의 동일한 부류들은 성령 충만, 즉 여분의 기름을 소유하는 것과 관련하여서도 모조(짜가)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사실 이 모조 성령 사역이 그들 메시지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오류는 오직 현 세대의 종말에 라오디게아 상태의 교파 내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활동일 뿐이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혼란을 야기하고 결국 미혹과 부패를 낳는다. 이것은 현 세대 매우 이른 시기에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던 누룩의 활동이 가져온 최종 결과의 한 단면이다(마태복음 13:33).
사탄의 이러한 활동에 사로잡혀 미혹된 그리스도인들은 귀신들의 세계에서 나오는 초자연적인 능력들의 나타남에 연루되고 있으며, 이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의 삶 속에 유사(프슈도Pseudo) 영적 사역을 받아들이도록 미혹되어, 당면한 영적 전쟁에 대한 유사 준비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 활동에 연루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현재의 패배만을 경험하게 되며, 이는 미래의 거부 즉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태복음 7:23에서 단어를 선택하실 때, 이 기적적인 사역들을 행하는 자들과 자신의 편에서는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없을 것임을 매우 주의 깊게 보여주셨다. 그러나 마태복음 25:12에서의 선언은 다르다. 기노스코 대신 오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경험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어떤 사실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신다.
비록 여분의 기름을 획득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적 지식이 수반되었을지라도, 문 밖에 있는 자들은 그러한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마태복음 7:21-23). 따라서 주님께서는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그대로의 단순하고 절대적인 선언이 적절한 응답이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그날에
그날에 문은 닫힐 것이다. 그리고 많은 개인들이 바깥에 남겨져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신랑께서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도록 허락된 자들 사이에 그들이 속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복음 25:1-13).
그 후, 이 동일한 이들은 왕국 입장을 거부당하는 자들 사이에 속하게 되어 “주여 주여 우리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왕께서는 마찬가지로, 그분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보좌에 오르도록 허락된 자들 사이에 그들이 속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복음 7:21-23; 마태복음 25:14-30).
두 부류 모두(구원받았으나 육신의 에너지를 따라 살았던 자들) 감람산 강화의 그리스도인 섹션을 마감하는 비유에서 바깥 어두운 데로 묘사된 장소에 남겨지거나(마태복음 25:30; 마태복음 22:11-13), 마태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예루살렘 성벽 바깥의 쓰레기 하차장인 게헨나로 묘사된 장소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5:29, 30; 23:15, 33).
이 무리들을 형성하는 자들은 지난 6,000년 동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모든 것이 그것을 향해 움직여왔던 활동, 곧 그리스도께서 땅을 다스리실 1,000년 동안의 통치(천년왕국)와 관련된 활동들로부터 차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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